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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의식의 신비

대니얼 데닛의 『의식이라는 꿈』을 읽고

심리철학자 대니얼 데닛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꽤 많은 저작이 번역되었다. 데닛의 저작을 번역된 출판물로만 구분하여 그의 연구 주제를 분류해 보자.


심리철학 일반: 『이런, 이게 바로 나야』, 『직관펌프』

진화: 『마음의 진화』,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

반종교: 『신 없음의 과학』, 『주문을 깨다』

자유의지: 『자유는 진화한다』

의식: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 『의식이라는 꿈』


이렇게 리스트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의식에 관련한 책이 두 권 있다(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도 의식에 관련되어 있으니까, 사실상 세 권)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라는 책은 의식 철학 분야의 고전...까지는 아니고 꼭 읽어야 할 필수 리스트로 얘기되고 있는 추세인데, 내가 대학원 공부하던 시절에도 원서 제목인 『Consciousness Explained』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이번 책, 『의식이라는 꿈』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인데, 왜냐하면 내가 몰랐기 때문에. (다 지 알알못 기준이네~)


미안한 말이지만 『의식의 수수께끼를 풀다』나 이 책이나 정말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의식이라는 문제가 원래 어려운 문제인데, 대니얼 데닛이 하고 싶은 말이 '의식이라는 문제는 어렵지 않아요~'라고 주장하는 게 책들의 내용이라는 게 아이러니다. 나로서도 뭐 의식의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본(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반 독서가 중에선 뭐 상위 1% 정도로 많이 고민해 봤다는 얘기) 입장으로서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이 점을 참고하여 아래의 책 요약에 대해서도 틀린 점, 누락된 점, 왜곡하고 있는 점을 누구든 허심탄회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보다 상위의 포지션에서 의식에 대해 고민해 본 일반 독서가 + 전문가 집단에서 말이다.)



 

의식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의식을 과학으로 연구하려 할 때 의식의 '주관적 경험'을 연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빨간 색깔의 사과를 본다. 과학은 '빨간 사과를 보는 당신의 심적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뇌파를 잴 수 있고, 빨간 색을 볼 때의 생리적 반응을 체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을 보면 파란 색보다는 미세하게 땀이 난다거나) 아니면 아예 심플하게, 무슨 색을 보았는지 물어보거나, 설문조사를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과학적 행위를 한다 해도, 당신이 '파란' 사과가 아닌, '빨간' 사과를 봤다는 주관적 경험을 검증할 수 없다. 이 '주관적  경험'을 철학에서는 감각질(Qualia)라고 부른다.


어쩌면, 당신이 의식이라는 것 없이 단지 알고리즘에 따라 인간과 완벽히 똑같은 행동만 하는 '좀비'라는 사실도 검증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 '철학적 좀비'라는 사고실험은 심리철학에서 매우 유명하다. (혹시 들어보지 못했다 해도 괜찮다. 우리에겐 유명한 심리철학 사고실험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시사 상식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당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좀비'가 있다. 그 좀비에게 말을 걸면 당신이 할 만한 답을 하고, 당신이 흔히 하는 행동들한다. 사실, 물리적으로 당신과 똑같다. 원자, 분자까지 다 똑같고 신경세포와 시냅스도 똑같다. 다만, 당신이 가진 것 같은 '의식의 주관적 성질'이 없을 뿐이다. 이런 좀비가 존재할 수 있을까?


Sweet Dreams: Philosophical Obstacles to a Science of Consciousness - Denial Dennett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라는 심리철학자는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철학적 좀비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차머스의 이 논리는 놀랍게도 물리주의를 배격하는 결론에 다다른다. 물리주의를 배격한다는 말의 뜻은, 물리학의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마음과 의식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이런 심리철학적 입장은 전통적으로 '이원론'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전 우주의 모든 것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으로 작동한다는 게 알려져 있고, 유일하게 남은 영역이 바로 이 마음과 의식인 이 마당에...


이에 관한 대니얼 데닛의 반격이 바로 이 책, 『의식이라는 꿈』이다. 반론 자체는 뭐...철학적 논증의 향연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이해한 바로는 다음과 같다. "어쨌든, 의식은 설명할 수 있다. 그 설명 방식은 아직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설명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을 리가 없잖아? 왜냐하면 마음은 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니까." 우리가 데이비드 차머스의 철학적 좀비주의를 이해하며 "아니, 물리학이 아닌 다른 법칙으로 마음이 작동되는 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냐고?"라고 생각했던 그 생각을 그냥 논리적으로 푼 것 뿐이다.


...정말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 의식은 단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여튼 언젠가는 다 설명할 수 있을 거야. 왜냐하면 (이러저러한 철학적으로 매우 괴롭고 이해 안되는 논증 후에) 때문에라도 설명할 수 없을리가 없기 때문이지."로 끝나는 것인가?





그럼 도대체 의식의 '감각질'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째서 감각질의 '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부분'을 고민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서 진행된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이 대사를 따라가면 어째서 의식과 감각질이 이렇게 이해 불가능한 현상인지가 나온다. A는 의식을 설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B는 대니얼 데닛이다.


A: "의식이란 관점을 가진 행위자이다. 그렇지 않은가?"
B: "글쎄, 나무도 자신의 표면 주변 온도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웹캠을 가진 로봇도 시각 정보를 가진 관점을 가진 행위자이다."
A: "그렇다면 이런 설명은? 의식은 받아들인 감각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다시 말해, 재귀적인 자기 관찰을 가지고 있다."
B: "웹캠을 가진 로봇에 '재귀적인 자기 관찰'에 대한 알고리즘을 짜 넣을 수 있다. 아직은 불가능하다 할 지라도...미래엔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로봇이 의식을 가졌다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A: "그렇다면 다음, 의식은 거기에 추가로 '선호'를 가질 수 있다."
B: "물론 로봇에 '선호'를 가지도록 만들 수 있다. (지금 안 된다면, 가까운 미래에...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A: "하지만 이런 '선호 알고리즘을 수행하는 로봇'이 우리가 빨간 사과를 볼 때 느끼는 그 빨감에 대한 주관적 느낌(감각질)을 가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A: "글쎄다, 로봇에 네가 말한 그 '주관점 느낌'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것 말고도 우리는 설명하지 못한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다. 실제 문제는, 의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너는 그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데닛은 이로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의 감각질을 (...) 모든 성향적 속성들과 논리적으로 독립된 경험의 내재적 속성들로 정의한다면, (...) 그들은 광의의 기능적 분석에 의해 포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보증받게 된다.


그리고 이 역사는 사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탐구했던 지난 과학사에서도 일어났었던 일이다. 생물학자들 생기론에 대해,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체의 무엇인가에 대해 논했었지만, 결국 그 생기론에 관한 가설들은 모조리 폐기되어 버렸다. 이로서 우리는 마음의 과학에 대한 미래 또한 예측할 수 있다. 의식의 주관적 경험과 감각질이란,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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